니까야와 아함경
고따마 부처님은 당신의 가르침이 원음(original sound) 그대로 암송되어서 마치 음악 CD처럼 음성을 통해서 후대에 전승되길 원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전승방법에는 약600명의 인원이 필요하였다고 하니, 재정적으로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재정적 부담이 문자를 이용한 전승방법이 등장한 이유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고따마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승하기 위하여 문자를 사용하여 방법에는 2가지가 있다.

1. 음사방식
예시
: 소리화일 => pitu(영어 알파벳), 삐뚜(한국어 알파벳)
장점 : 고따마 부처님의 가르침이 훼손되지 않는다.
단점 : 동일한 내용의 경전들이 지루할 정도로 여러번 반복된다.

2. 번역방식
예시
: 소리화일 => father(영어 번역), 아버지(한국어 번역)
장점 : 동일한 내용의 경전들을 하나로 압축할 수 있다.
단점 :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번역자의 이해 수준이 저급한 경우, 그의 가르침이 훼손될 수 있다.

니까야는 고따마 부처님의 가르침을 음사방식으로 전승하고 있지만, 아함경은 번역방식으로 전승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불교신자들은 한글로 번역된 니까야와 아함경을 동시에 접할 수 있는 상황인데 그 두 종류의 경전들이 내용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음에 매우 놀라워 하고 있다. 한글로 된 아함경이 한국에서 탄생하게된 여정은 다음과 같다. 암송경전 => 북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로 번역 =>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 => 한국에서 한글로 번역

6내입처
비구들이여, (안이비설신의)/은 오래된 업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고 의도의 토대가 되는 것이고 느낌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업 경 S35:146).

어떤 것을 눈의 인·눈의 연·눈의 얽맴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눈은 업이 그 인이고 업 연이며 업이 얽매는 것이다 (잡아합경 334 유인유연유박법경).

니까야와 아함경 모두 6내입처(안이비설신의)와 업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
아난다여, 욕계의 과보를 가져오는 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욕계의 존재를 천명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존재경 AN 3.76)

니까야의 '이 없다면 존재도 없다'는 구절은 후설(E. Husserl, 1959~1938 ; 현상학)의 말, '생각이 없다면 대상도 없다'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생각 = .

과 시간 / 과 공간
비구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눈()은 무아이니 하물며 현재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안의 무아경 S35:9)

니까야에서는 과거, 미래 그리고 현재를 동시에 언급하는 방식으로 업시간으로부터 독립되어있음을 전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소멸할 때에도 가는 곳이 없다. (잡아합경 335 제일의공경)

아함경 에서는 오는 곳과 가는 곳을 동시에 언급하는 방식으로 업공간(장소)으로부터 독립되어있음을 전하고 있다.

열반의 위치에서 업를 바라보면 업의 과거, 미래 그리고 현재의 구분은 있을 수 없으며 어디로 부터 또는 어디로 또한 있을 수 없다.

무아와 공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 이것은 나의 자아.’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아상응경 S22:59)

 
비구들아, 만일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들이 과연 그런 것에 대해 '이것은 . 소유된 것이다.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잡아함경 86. 무상경)

 

세존이시여, '한 세상, 한 세상'이라고들 합니다. 도대체 왜 공한 세상이라고 합니까? 아난다여, 자아자아에 속하는 것이 공하기 때문에 공한세상이라 한다. (공한 세상경 S35:85)

'
무상하다(無常)하다'고 관찰한 것과 같이, 그것들은 괴로움()이요, 하며, 나가 아니다(非我)'라고 관찰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잡아함경 1. 무상경)

아라한 성인의 업보業報
아함경에서는 대체로 경전의 핵심 내용을 그 경전의 제목으로 사용한다. '제일의공경'이라는 제목이 달린 제335경에서는 업이 공(내것이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임을 깨달은 아라한 성인이 업보業報(의 결과)를 어찌 생각하고 있는 지를 설명하고 있다.

업보業報는 있지만 짓는 자[作者]는 없느니라. (잡아합경 335 제일의공경)

아라한 성인에게는 중생을 크게 이롭게 하는 업보業報(의 결과)가 있어도 자신이 그것을 지었다는 생각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2019.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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